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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르실리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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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르실리 1세는 기원전 16세기 히타이트 왕국의 왕이었다. 하투실리 1세의 손자였던 그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북부 시리아에서 전쟁을 재개하고, 야므하드 왕국과 알레포를 정복했다. 또한, 기원전 1595년에는 메소포타미아로 원정하여 바빌론을 약탈했으나, 바빌론을 점령하지는 않았다. 바빌론 원정 후 귀환하던 중 암살당했으며, 그의 죽음은 히타이트 제국의 사회적 불안을 초래했다. 무르실리 1세는 비디오 게임 《문명 III》에 등장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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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르실리 1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칭호히타이트
배우자칼리
친척하라프실리 (자매)
부모Ḫaštayara 하슈타야라
후임한틸리 1세
생애
재위 기간기원전 1540년경 - 기원전 1530년경
왕조
왕가불명
전임 및 후임
전임자하투실리 1세
후임자한틸리 1세
대수3대
직책히타이트 왕
임기기원전 1620년 - 기원전 1595년

2. 즉위 배경

무르실리 1세는 전왕 하투실리 1세의 손자였다. 하투실리 1세는 자신의 아들들이 반역을 꾀하자 이에 분노하여 귀족 회의를 열었고, 이 회의에서 무르실리 1세를 후계자로 인정받았다. 하투실리 1세가 사망한 후, 무르실리는 미성년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6] 그는 젊은 나이에 즉위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찍부터 주변 국가와의 전쟁에 종사했다.

3. 군사 원정


  • 바빌론 약탈교전 세력 1히타이트 제국교전 세력 2얌하드 왕국
    바빌론
    소규모 시리아 도시 국가들지휘관 1무르실리 1세지휘관 2일리밈마 1세
    삼수-디타나피해양측 불명



그는 먼저 시리아 방면으로 군대를 이끌어, 하투실리 1세가 성공하지 못했던 얌하드 왕국과 그 수도 알레포를 함락시켰다. 이를 통해 시리아 북부에서 히타이트의 영향력을 크게 넓혔다. 또한 히타이트 왕국 동쪽의 토로스 산맥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 지역을 정복했으며, 남부의 Kizzuwatna|키즈와트나hit(후대의 킬리키아) 지역을 확보하여 남방 진출의 중요한 거점을 마련했다.

이후 무르실리 1세는 메소포타미아 방면으로 눈을 돌려, 기원전 1595년경(다른 연대 추정으로는 기원전 1531년경[11]) 바빌론까지 약 2000km에 달하는 대규모 원정을 감행했다. 이 원정에서 그는 당시 약화된 바빌론 제1왕조의 왕 삼수-디타나를 꺾고 도시 바빌론을 약탈했다. 이 원정은 히타이트의 위상을 크게 높였으나, 바빌론을 직접 통치하지는 않고 철수했다.

3. 1. 바빌론 원정 (기원전 1595년경)

하투실리 1세가 이루지 못했던 야므하드 왕국과 그 수도 알레포를 정복한 무르실리 1세는 선왕의 시리아 방면 확장 정책을 계승하여 히타이트의 국경선을 넓혔다. 그는 토로스 산맥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 지역을 정복했으며, 특히 남부의 Kizzuwatna|키즈와트나hit(후대의 킬리키아) 지역은 그의 남방 진출에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시리아에서의 성공 이후, 무르실리 1세는 더욱 멀리 메소포타미아 방면으로 눈을 돌려, 약화된 바빌론 제1왕조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기원전 1595년경(다른 연대 추정으로는 기원전 1531년경[11]) 하투샤를 출발하여 메소포타미아 중심부까지 2000km에 달하는 전례 없는 장거리 원정을 감행했다. 이 원정에서 그는 바빌론 왕 삼수-디타나를 꺾고 도시 바빌론을 약탈하여 파괴했으며, 많은 전리품과 포로를 수도 하투샤로 가져왔다.

그러나 무르실리 1세는 바빌론을 점령하지 않고 곧바로 철수했으며,[8] 귀환하는 길에는 후르리인의 왕국도 격파했다. 이 원정은 함무라비가 세운 아모리트 왕조를 완전히 멸망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바빌로니아 지역에 권력의 공백 상태를 초래했다. 이 공백을 틈타 카시트족이 바빌로니아를 장악하게 되었으며, 이들의 지배는 이후 약 400년간 지속되었다.

바빌론 원정의 구체적인 동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이 원정이 히타이트의 위신을 크게 높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성공적인 원정에도 불구하고, 무르실리 1세는 귀국 직후 의붓 형제인 한틸리 1세가 일으킨 쿠데타암살당했다. 이는 무르실리의 즉위에 불만을 품은 귀족들이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3. 1. 1. 원정 동기에 대한 가설

무르실리 1세가 기원전 1595년 또는 기원전 1531년경[11]메소포타미아 중심부의 바빌론을 약탈하기 위해 아나톨리아하투샤를 출발하여 2000km에 달하는 전례 없는 장거리 원정을 감행한 정확한 동기는 명확하지 않다. 여러 가설이 제시되고 있지만, 히타이트와 바빌로니아 양측 모두 관련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아 "무르실리 1세가 바빌론을 파괴하고, 포로와 전리품을 하투샤로 옮겼다"라는 사실 정도만 알려져 있다.

여러 가설 중 하나는 기후 변화로 인한 식량 확보설이다. 윌리엄 브로드(William Broad)는 당시 테라 화산 폭발로 인한 화산재 구름이 히타이트 지역의 농작물 수확량을 감소시켰고, 부족한 곡물을 확보하기 위해 바빌론 원정에 나섰을 가능성을 제기했다.[7]

또 다른 가설은 정치적, 외교적 목적이다. 바빌론 약탈이 아나톨리아에 있는 히타이트의 권력 중심지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바빌론 지역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를 목표로 한 것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대신, 이 원정은 당시 함무라비가 세운 아모리트 왕조를 멸망시키고 카시트족이 바빌론의 권력을 장악하도록 돕기 위한 행동이었을 수 있다. 즉, 카시트족과의 동맹을 맺거나 그들에게 호의를 얻기 위한 전략적 판단이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8]

무르실리 1세 개인의 야망이 원정의 동기였을 수도 있다. 선왕이자 할아버지인 하투실리 1세가 야므하드 왕국의 수도 알레포 정복에 실패했던 것과 달리, 무르실리 1세는 알레포를 함락시키는 등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다. 이러한 성공에 더해, 선왕의 업적을 뛰어넘으려는 개인적인 동기에서 메소포타미아까지의 장거리 원정을 감행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9]

마지막으로, 약화된 바빌론 제1왕조를 공격하여 실질적인 이득을 얻으려 했을 가능성도 있다. 당시 바빌론 왕 삼수-디타나를 꺾고 바빌론 시를 파괴함으로써 막대한 전리품을 획득하고, 동시에 히타이트 제국의 위신을 국제적으로 높이려는 목적이 있었을 수 있다.

어떤 동기였든, 무르실리 1세는 바빌론을 점령하지 않고 곧바로 철수했으며, 귀환하는 길에 후르리인의 왕국을 격파했다. 이 원정의 결과로 바빌로니아에는 권력 공백 상태가 발생했고, 이를 틈타 카시트인이 바빌로니아를 장악하여 이후 약 400년간 지배하게 되었다. 한편, 무르실리 1세는 원정에서 돌아온 직후 의붓 형제인 한틸리 1세가 일으킨 쿠데타암살당했다.

4. 암살과 그 이후

바빌론 원정에서 성공적으로 귀환한 무르실리 1세는 예상치 못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의 매제인 한틸리 1세와 한틸리의 사위 지단타 1세가 주도한 쿠데타 세력에 의해 암살당한 것이다.[10] 한틸리 1세는 이 정변을 통해 왕위를 차지했다.[10] 이러한 비극적인 사건의 배경에는 무르실리 1세의 즉위에 대해 불만을 가진 귀족 세력이 상당수 존재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무르실리 1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히타이트 제국에 큰 혼란을 야기했다. 사회적 불안이 가중되었고 중앙 정부의 통제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이러한 내부 혼란은 외부에도 영향을 미쳐, 시리아 지역에서 어렵게 확보했던 영토를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했다.[10]

5. 대중문화 속의 무르실리 1세

2001년 발매된 비디오 게임 ''문명 III''에서 히타이트 문명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게임 내에서는 이름을 라틴어화한 '무르실리스'(Mursilisla)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참조

[1] 서적 A Historical Geography of Anatolia in the Old Assyrian Colony Period
[2] 서적 Pax Hethitica: Studies on the Hittites and Their Neighbours in Honour of Itamar Singer
[3] 간행물 Integrated Tree-Ring-Radiocarbon High-Resolution Timeframe to Resolve Earlier Second Millennium BCE Mesopotamian Chronology https://journals.plo[...] 2016-07-13
[4] 서적 The Tawananna in the Hittite kingdom https://books.google[...]
[5] 서적 Greeks And Pre-Greeks: Aegean Prehistory And Greek Heroic Tradition
[6] 서적 The Kingdom of the Hittites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7] 뉴스 It Swallowed a Civilization. New York Times 2003-10-21
[8] 서적 The Kingdom of the Hittites
[9] 서적 The Kingdom of the Hittites
[10] 서적 The Hittites and their World https://books.google[...]
[11] 문서 中年代編年による年代。高年代編年で紀元前1595年、低年代編年では紀元前1507年とされ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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